박정희 대령, 무례한 미군 대위에게 분개 "선 오브 비치" .. JP, 카터 철군 정책에 "대대장으로 최전선서 싸우겠다"

이 시국에 중앙일보는 이런 기사를 내고 저렇게 기술/인용해놨다.

기가찬다기가차




박정희 대령, 무례한 미군 대위에게 분개 "선 오브 비치" .. JP, 카터 철군 정책에 "대대장으로 최전선서 싸우겠다"

1979년 7월 1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영애 박근혜(현 대통령)가 한국을 떠나는 카터 대통령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은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 여사, 왼쪽 둘째는 딸 에이미. 박 대통령은 2박3일 일정으로 방한한 카터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놓고 공박을 벌였다. [중앙포토]현재 이미지 공유하기
1979년 7월 1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영애 박근혜(현 대통령)가 한국을 떠나는 카터 대통령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은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 여사, 왼쪽 둘째는 딸 에이미. 박 대통령은 2박3일 일정으로 방한한 카터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놓고 공박을 벌였다. [중앙포토]
강화도 광성보에 있는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1977년 10월 강화 전적지를 둘러본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듬해 건립됐다. [중앙포토]현재 이미지 공유하기
강화도 광성보에 있는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1977년 10월 강화 전적지를 둘러본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듬해 건립됐다. [중앙포토]
1975년 4월 2일 김종필(JP) 국무총리가 방한한 도널드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자리에서 프레이저는 “민주화를 필리핀·파키스탄한테서 좀 배우라”고 충고했고, JP는 “민주주의를 지탱할 경제력이 없는 나라가 무슨 민주주의를 한다는 말이냐”고 받아쳤다. [사진 국가기록포털]현재 이미지 공유하기
1975년 4월 2일 김종필(JP) 국무총리가 방한한 도널드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자리에서 프레이저는 “민주화를 필리핀·파키스탄한테서 좀 배우라”고 충고했고, JP는 “민주주의를 지탱할 경제력이 없는 나라가 무슨 민주주의를 한다는 말이냐”고 받아쳤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1973년 6월 14일 김종필 국무총리(왼쪽)가 일본 총리관저에서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와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현재 이미지 공유하기
1973년 6월 14일 김종필 국무총리(왼쪽)가 일본 총리관저에서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와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현재 이미지 공유하기

70년대 미국 하원의 국제기구소위원회를 이끌던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은 한국의 민주화 후퇴·인권탄압을 들먹이며 압박을 가했다. 75년 4월 국무총리였던 나는 방한한 그와 만났다. 프레이저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대해 공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민주주의를 필리핀과 파키스탄에서 좀 배우라”고 큰소리쳤다.

내가 “필리핀이 민주주의 선진국이냐”고 따지자 그는 “한국보다는 선진화돼 있다”고 했다. 그의 말에 강대국의 독선과 우월감, 민주주의에 대한 허위 의식이 넘쳐났다. 나는 지지 않고 받아쳤다. “민주주의를 그 따위로 해석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미국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소. 민주주의를 지탱할 경제력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한단 말이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지탱할 경제력을 가진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소.” ‘선(先) 산업화-후(後) 민주화’의 내 논리에도 프레이저는 주장을 꺾지 않았다.

나는 “누가 옳은 길을 걷는지 알아차리는 날이 올 거요”라고 소리쳤다. 일본으로 건너간 프레이저는 일본 국회의원들에게 “한국에서 JP를 만나서 기합만 받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한다. “왜 거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느냐”는 일본 의원의 질문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와의 면담에서 그는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이란 국가 발전의 이치를 느꼈을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중압감을 주는 결정적인 문제가 주한미군 철수였다. 69년 7월 닉슨 대통령은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 발표를 예견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폭탄선언이었다. “아시아 국가는 대미 의존을 버리고 스스로 집단 안보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듬해 미국 국방부는 주한미군 일부 철수 계획을 수립해 71년 3월 7사단 병력 2만 명을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박 대통령은 내심 크게 당황했다. 북한 김일성이 환갑잔치를 서울에서 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비상 시국이었다. 역사는 불가측(不可測)의 측면을 열어놓고 있다. 세계 정세의 변용기(變容期)에 영지(英智)와 노력을 모아 현명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때부터 박 대통령은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면서 싸우자”는 구호를 내걸고 자주 국방 태세 확립에 주력했다. 그는 “북한이 전쟁을 도발한다면 수도 서울에서 절대로 철수 않고 전 시민과 함께 대통령도 남아 사수할 것”(75년 4월 안보강화 특별담화)이라고 결의를 나타냈다. 나 역시 “전쟁이 나면 최전선의 대대장으로 나서서 싸우겠다”며 호국 의지를 고취시켰다.

 76년 11월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건 지미 카터의 당선은 새로운 외교적 과제를 던졌다. 그는 공약대로 4, 5년 안에 모든 주한 미지상군을 철수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미군 수뇌부가 ‘주한미군 철수는 곧 전쟁’이라며 반대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78년 12월 1개 보병 대대를 포함한 주한미군 3400명이 1차로 철수했다.

박 대통령은 카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박 대통령은 77년 4월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입장을 밝혔다. “주한 미지상군을 계속 주둔시킬 것을 요청할 의사는 없다. 한국은 이제 군사력에서 북한을 앞선다. 중공·소련의 지원이 없는 북한의 단독 남침이라면 한국이 자력으로 격퇴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의 지시로 100여 년 전 조선 군대가 미국 함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강화도 신미양요(辛未洋擾) 전적지가 복원된 것도 이때였다.

카터 대통령은 79년 6월 말 방한해 박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회담을 했다. 미국에 싫은 소리를 자제해 온 박 대통령이지만 카터와는 안보문제에 관해 공박을 벌였다. 정상회담 분위기는 싸늘했다. 20여 일 뒤 카터 대통령은 추가 철군을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군사력이 종전 평가보다 훨씬 증강됐다는 이유였다. 우리 측이 ‘주한미군 나갈 테면 나가라’고 하자 정작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지 못했다. 배수진을 치는 지도자의 결의가 위기를 돌파하게 한 것이다.

 용미(用美)를 위해 박 대통령과 내가 역할을 분담했다면 용일(用日)에 있어서는 내가 주로 총대를 멨다. 박 대통령은 재임 중 일본을 공식 방문한 적이 한 번도 없다. 61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방미하던 길에 도쿄에 30시간 체류한 것이 전부였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만주군관학교를 다닌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 앞에서도 만주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제 시절 만주는 일본은 물론 한국의 젊은이들에겐 도피처였다. 답답한 식민조국의 현실에서 벗어나 새 인생을 개척하기 좋은 무대라고 여겼다.

박 대통령이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로 간 것도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자는 포부였다. 식민지 청년의 비애를 겪으면서 그는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사에 특별입학을 했다. 그 경험이 집권 후 극일(克日) 외교의 바탕이 됐지만 그는 그 경력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심중을 헤아렸기에 일본과의 관계에선 내가 앞장섰다. 김·오히라 메모로 한·일협정의 물꼬를 텄고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 관계가 경색됐을 때도 다나카 총리를 만나 해결했다. 양국 지도자가 신뢰를 바탕으로 친하게 지내면 외교도 쉽게 풀리는 법이다. 과거사 문제가 깔린 복잡 미묘한 한·일 관계야말로 지도자 간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깨우쳤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우리는 약소국이었지만 미국과 일본을 견제하면서 활용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부국강병 기틀을 만들기 위한 국가 운영의 전략적인 지혜와 경륜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로 혈맹(血盟)이란 말이 있다. 6·25 전쟁 때 대한민국을 구한 미군의 희생, 베트남전에서 미군을 도운 우리의 파병을 포함해 두 나라의 특수한 관계를 일컫는 표현이다. 한·미는 혈맹 관계지만 민족주의와 자주국방, 민주화 문제를 놓고 시각 차이를 드러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 18년 미국과의 관계는 친밀과 갈등, 불화(不和)와 우의(友誼)의 연속이었다.

 1961년 5·16을 일으킨 혁명세력에 대한 미국의 첫 반응은 경계와 의심이었다. 혁명 지도자 박정희 소장의 과거 전력이 빌미가 됐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조국 근대화를 모토로 내세운 나 역시 경계의 대상이었다. 급진주의자 또는 반미주의자가 아니냐는 의심이 한동안 이어졌다. 혁명 직후 북한의 무역상 부상(副相) 출신인 황태성이 남파돼 간첩 혐의로 체포되자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그의 인계를 요구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사상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미국과의 관계는 월남 파병 직후 존슨 대통령 시절을 제외하고는 순탄치 않았다. 박 대통령은 나와 술을 마시면서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더니 미국 사람들이 딱 그렇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공개적으로는 미국을 자극할 만한 발언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통령이란 위치에서 미국은 절대 필요한 우방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압력이나 간섭이 못마땅하더라도 국익을 위해 대통령은 자제할 수밖에 없다. 못마땅한 것과 인정해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이 바로 국가를 통치하는 자의 자세다.

 미국에 발언을 자제한 것은 대통령이란 직위 때문이었지 박 대통령의 민족주의적 자존심에는 맞지 않았다. 그는 사대주의에 대해 체질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장교 시절 그는 미군에 대해 할 말은 기어코 했다.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53년 박정희 대령은 다른 대령 예닐곱 명과 함께 전방 미군 포병대에서 교육을 받았다. 포병으로 병과를 바꿔 준장으로 진급하기 위해서였다. 교육을 맡은 미군 대위가 어느 날 “대령 여러분, 별 달고 장군이 되려면 매주 보는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합니다”고 했다. 버릇없는 그 말투에 박정희 대령이 발끈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넌 교육만 하면 되지 진급을 시키고 안 시키고가 무슨 상관이야. 나쁜 자식 같으니”라고 소리쳤다. 통역병이 이 말을 옮기다가 ‘나쁜 자식’이란 단어에서 주저하자 그는 “못하면 내가 하지. 갓댐 선 오브 비치!(Goddam, son of bitch)”라고 외쳤다.

 나라를 이끌면서 미국에 대한 싫은 소리는 박 대통령 대신 내가 맡아 했다. 미국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강온(强穩) 양면의 역할 분담이었다. 62년 11월 미국에서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을 만났을 때다. 나는 처음에 다소 건방진 태도를 보인 로버트 장관을 향해 “당신네 나라가 우리 한반도를 지구상에서 가장 비참한 분단의 아픔을 안게 한 원인을 만들었소”라고 따졌다. 그가 “그 원인이 무엇이오?”라고 묻기에 이렇게 답해줬다. “38선을 누가 만들었소. 딘 러스크 육군 대령이 긋지 않았소. 왜 아무 죄 없는 한국을 반으로 갈라 놓았느냐 말이오. 우리를 분단시켜 싸우게 만든 것이 바로 미국이오.” 로버트의 형 존 F 케네디(JFK) 정부에서 국무장관에 오른 러스크는 대령 시절이던 45년 8월 한반도 지도에 38선을 그어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케 하는 초안을 만들었다. 장래를 전혀 내다보지 못한 전략적 패착이었다. 나는 해방 전 미국이 우리에게 끼친 쓰라린 인과(因果)를 지적한 것이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ng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데이비드 딘 러스크(1909~94)= 1945년 8월 육군성 참모진(대령)으로 근무할 때 한반도 미·소 분할 점령의 지역 경계를 북위 38도선으로 획정하는 안을 만들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수도 서울을 미군 관할 아래 두기 위한 적당한 분계선을 찾다가 동료 찰스 본스틸 대령과 급히 찾아낸 것이 38선”이라고 밝혔다.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였던 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의 신속한 개입 정책을 지지했다. 61년 케네디 정권 출범과 함께 국무장관에 취임했고 존슨 정부에서 베트남전 정책을 보좌했다.

0  Comments
댓글 쓰기